비 오는 날의 아이러니 –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작품 요약
서울 종로 거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인력거꾼 김 첨지의 단 하루를 따라간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궂은 날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일이 뜸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아침부터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김 첨지는 속으로 생각한다. “오늘은 운수가 좋다.”
하지만 이 ‘운수’의 그림자엔 아픈 아내가 누워 있다. 병이 깊어져 거의 말을 잃은 그녀는, 전날 밤에 겨우 입을 열어 “오늘은 꼭 돈을 좀 벌어 오세요”라고 말한다. 김 첨지는 그 말이 가슴에 남은 채 새벽부터 인력거를 끌고 거리로 나선다.
첫 번째 손님은 약간 어눌한 청년이었다. 잠깐 돈벌이는 되었지만, 큰 수입은 아니다. 다음 손님은 급히 병원으로 가야 하는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태우고 달리는 동안, 김 첨지는 그녀가 자신의 아내처럼 병든 사람을 찾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속 불안이 잠시 고개를 든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일은 더 잘 풀린다. 오후엔 부유한 두 신사를 태우게 된다. 그들은 가볍게 담배를 피우며 시시덕거리고, 부인의 외모에 대해 농을 주고받는다. 김 첨지는 그 대화를 들으며 자신과는 너무 다른 그들의 삶에 씁쓸함을 느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같은 날 운이 좋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하루 종일 비가 오지만, 돈은 계속 모이고 있었다.
저녁 무렵, 김 첨지는 오늘 번 돈을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집에 갈 준비를 한다. 집에 가기 전, 병든 아내에게 먹일 음식을 사기로 한다. 설렁탕집에 들러 "국물 진하게, 고기 넉넉히"를 부탁한다. 오랜만에 이렇게 마음이 뿌듯한 건 처음이다. 그는 설렁탕을 조심스럽게 들고 비를 뚫고 집으로 향한다.
그러나 집에 들어선 순간, 기운이 이상하다. 아내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의 돈벌이와 설렁탕은 이미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김 첨지는 망연자실한 채 멍하니 중얼거린다.
“이렇게 운수가 좋은 날인데…”
김 첨지의 하루는 그렇게 끝난다. 운수가 좋았다. 돈을 벌었다. 하지만 삶의 본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정반대의 결말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과서적 주제
'운수 좋은 날'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단편이다. 작가는 도시 빈민층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현실의 비극을 회피하지 않는다. 특히 '운수 좋은 날'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은, 하루 벌이의 작은 성공이 인생의 근본적 불행을 바꿔주지 못한다는 사회적 비극을 강조한다. 가족, 질병, 빈곤, 생계… 작품은 이 모든 요소를 날 것 그대로 독자에게 내던진다.
생각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김 첨지는 단순한 인력거꾼이 아니라 ‘정규직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매일의 노동 속에서 조금만 여유가 생겨도 희망을 걸어보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그의 하루는 ‘배달 라이더’, ‘플랫폼 노동자’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김 첨지의 마지막 말은 삶의 ‘불균형한 균형’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밥을 벌고, 누군가는 숨을 거두고… 삶과 죽음은 늘 한집에 공존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종종 ‘운수 좋은 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진짜 좋은 날이란, 그 하루가 끝났을 때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는 날 아닐까? 김 첨지의 하루는 그 반대를 보여주며, 오늘 우리에게 진짜 삶의 무게를 다시 묻는다.
저자 소개: 현진건
현진건(1900~1943)은 한국 근대문학의 사실주의 문학을 선도한 작가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B사감과 러브레터' 등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단편들로 독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하는 능력을 지녔다. 특히 「운수 좋은 날」은 간결한 서사 안에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슬픔과 부조리를 담아낸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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