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 『두 파산』 – 두 개의 무너짐, 두 개의 시대

2025. 4. 29. 19:26·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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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두 파산』 – 두 개의 무너짐, 두 개의 시대

 

염상섭의 『두 파산』은 개인의 몰락과 사회의 붕괴가 교차하는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한, 시대의 초상을 담은 작품이다.

작품 줄거리 요약

1920년대 경성. 김선옥은 한때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이었다. 성실하게 공부하여 출세를 꿈꿨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를 작은 서점 주인으로 밀어넣었다. 서점 운영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책은 팔리지 않고, 늘어나는 빚은 목을 조여왔다.

 

먼지가 내려앉은 서가와, 고개를 숙인 김선옥이 계산대를 지키는 모습
먼지가 내려앉은 서가와, 고개를 숙인 김선옥이 계산대를 지키는 모습

 

가장 절박했던 어느 날, 김선옥은 옛 친구 백기찬을 찾아간다. 과거 함께 이상을 품고 공부했던 친구지만, 이제 백기찬은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고급 차림새, 부유한 생활, 김선옥의 눈에는 백기찬이 마치 '성공' 그 자체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백기찬 역시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그의 사업은 겉으로만 번창했을 뿐, 내실은 투자 실패와 부채로 엉망이었다. 체면을 위해,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연민으로, 그는 소액을 빌려준다. 그러나 이 돈은 김선옥에게 아무런 실질적 구제가 되지 못한다.

 

고급 응접실 소파에 앉은 백기찬과 초라한 옷차림의 김선옥
고급 응접실 소파에 앉은 백기찬과 초라한 옷차림의 김선옥

 

김선옥은 빌린 돈으로 빚을 막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결국 서점은 문을 닫게 되고, 그는 채권자들에게 쫓기듯 경성을 떠난다. 자신이 꿈꿨던 인생과는 전혀 다른 초라한 결말 앞에, 그는 무력하게 주저앉는다.

백기찬 또한 곧이어 몰락한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신용을 잃고, 화려했던 삶은 산산조각 난다. 아내는 집을 떠나고, 친구들도 등을 돌린다. 마지막엔 싸구려 하숙집에 쓸쓸히 남겨져, 잊힌 인물이 되어버린다.

 

허름한 하숙방 침대에 홀로 앉아 텅 빈 시선을 던지는 백기찬
허름한 하숙방 침대에 홀로 앉아 텅 빈 시선을 던지는 백기찬

 

"두 파산"은 결국 개인적 실패에 머무르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 불안정한 경제 구조와 허위로 가득 찬 사회 체계 속에서, 누구도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음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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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주제와 핵심 메시지

『두 파산』은 개인의 실패를 넘어, 시대의 총체적 붕괴를 드러낸다. 김선옥과 백기찬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근대적 성공’을 꿈꾸지만, 식민지 현실은 그들을 번번이 좌절시킨다. 신분상승, 자본축적, 근대적 자아 실현 같은 표어들이 무색하게, 작품 속 인물들은 "성공"이란 신기루를 좇다 함께 무너진다.

또한, 인간관계의 허위성 — 위로와 연대가 아닌 체면과 이해타산으로 얽힌 인간들 — 을 신랄하게 묘사해, 사회적 연대의 붕괴도 보여준다. 두 파산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한 사회구조의 필연적 결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감상 및 개인적인 해석

『두 파산』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몰락의 풍경’이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영웅적 저항도, 눈부신 재기의 서사도 없다. 오히려 작가는 덤덤하게 인물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 비극적 침묵이 오히려 더 강렬한 울림을 남긴다.

현대 사회에서의 급변하는 경제, 불안정한 일자리, 허상처럼 제시되는 ‘성공 신화’... 오늘날 청년 세대 역시 김선옥이나 백기찬처럼 보이지 않는 파산을 경험한다. 『두 파산』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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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와 시대적 배경

염상섭(1897–1963)은 일제강점기 조선 문학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작가다.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 등 현실을 정직하게 기록한 작품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날카롭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두 파산』이 발표된 1920년대는 경성(서울)이 겉으로는 근대화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식민지 수탈 구조 아래 신음하던 시기였다. 이 모순된 근대가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함께 읽어보기

염상섭의 『두 파산』을 읽고 나면, 같은 시대를 살아낸 또 다른 문학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식민지 청년의 방황을 섬세하게 그린 김승옥의 『무진기행』 리뷰를 함께 보면, 개인적 절망과 사회적 부조리가 교차하는 지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 리뷰도 함께 참고하면, 식민지기의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보다 심층적인 배경 이해를 원한다면 국립중앙도서관 '염상섭 작가 소개 페이지'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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