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에 담긴 침묵의 저항 – 현진건 『술 권하는 사회』
작품 요약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는 제목만 보면 가벼운 풍자극 같지만, 그 안에 담긴 주제는 꽤나 묵직하다. 작품은 일제강점기의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져가는 한 지식인의 비극을 그린다.
이야기는 ‘나’가 친구 윤 선생을 오랜만에 만나며 시작된다. 장소는 다름 아닌 술집이다. 윤 선생은 과거 진보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교육자였다. 그러나 오늘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은 어딘지 피곤하고 허탈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말을 건네고, 대화의 물꼬를 트려 하지만 윤 선생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계속해서 술만 마신다.
이 침묵은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의 침묵은 무언의 항변이며, 내면의 갈등이 오랜 시간 퇴적된 결과다. ‘나’는 어색한 공기를 깨려 애쓰며 그에게 요즘 사는 이야기를 묻는다. 그러나 윤 선생은 가끔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또 술을 들이킨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아내 이야기를 꺼낸다. 그는 집에서조차 점점 말이 없어졌고, 아내는 그런 침묵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하루는 아내가 식탁 앞에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그 ‘사회’라는 집엔 자주 가지 마오. 자꾸 늦게 들어오니까…”
그 말에 윤 선생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금세 표정이 굳는다. 그녀는 ‘사회’가 현실의 고단함이나 세상의 구조가 아니라, 술집 이름이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 순간, 자조와 체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아내는 배우지 못했고, 세상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그 무지함이 더 정직한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의 고백은 감정적이지도 않고, 웅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너무 담담해서 더 슬프다. 윤 선생은 말을 끝내고 다시 술을 따른다. ‘나’는 그가 말하지 않은 나머지 이야기를 짐작한다. 이상을 꺾은 시대, 목소리를 내면 살아남을 수 없던 현실. 결국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체념과 생존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윤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며 술값을 ‘나’에게 맡기고 자리를 떠난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말없이도 모든 감정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짧은 술자리는, 무너진 꿈과 그 무너짐을 바라보는 동료의 애절함이 교차하는 작은 드라마다.
교과서적 주제
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억압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무너져가는가를 그리고 있다. 특히 윤 선생이라는 인물은, 현실에 밀려 자의식과 사명을 잃어가는 지식인의 상징이다.
또한, ‘술’은 현실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수단이며, 동시에 사회가 강요하는 침묵과 순응의 상징이다. 윤 선생은 말하지 않지만, 그의 술 마시는 행위는 곧 시대를 향한 조용한 비명이다.
작품은 또한 ‘침묵의 언어’를 중심에 둔다. 현진건은 윤 선생의 무언의 태도를 통해,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입증한다.
생각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단지 과거의 슬픈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우리는 술로 현실을 잊으려 하고, 말 대신 회피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윤 선생은 단순한 패배자가 아니다. 그는 한때 뜨거운 이상을 품었고, 그 이상이 꺾이는 순간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이다. 현대 사회의 수많은 청년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역시 크고 작은 윤 선생일 수 있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윤 선생이 술잔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 장면은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무능하다고 쉽게 단정하지 않는가? 침묵은 때론 가장 절실한 저항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작품은 조용히 가르쳐준다.
작가 소개: 현진건
현진건(1900~1943)은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작가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부조리와 사회적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한 작품들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인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빈처' 등은 인간의 무력함과 동시에, 거기서 드러나는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특히 현진건의 문장은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문학적 힘이 있다. ‘말보다 침묵’이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세계문학전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 테네시 윌리엄스 [세계문학전집 책리뷰] (0) | 2025.04.04 |
---|---|
춘향전 열녀춘향수절가 [한국문학 책리뷰] (0) | 2025.04.03 |
크리스마스 선물 - 오 헨리 [세계문학전집 책리뷰] (0) | 2025.04.03 |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세계문학전집 책리뷰] (0) | 2025.04.03 |
B사감과 러브레터 - 현진건 [한국문학 책리뷰] (0) | 202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