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의 탈을 벗다 – 『배비장전』, 조선 풍자의 유쾌한 한 방

2025. 5. 14. 12:33·세계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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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탈을 벗다 – 『배비장전』, 조선 풍자의 유쾌한 한 방

 

위선과 허세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통쾌한 웃음, 『배비장전』은 조선 후기 민중의 거침없는 풍자를 담은 대표적인 한문소설이다.

작품 줄거리 요약

조선 후기, 외지로 떠나는 관리들의 권위를 과시하던 시대. 학식과 문장으로 이름난 사대부 배비장은 제주 목사의 수행원으로 제주도로 가게 된다. 그는 떠나기 전, 주변 사람들 앞에서 장담한다. “나는 절대로 기생과 어울리지 않겠소! 그런 천한 유혹에 빠질 내가 아니오!” 하지만 이 장담은 오히려 그가 얼마나 체면과 허세에 얽매여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제주도로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배비장은 유난히 단정한 옷차림과 근엄한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이미 잔치판과 기생집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결연한 맹세 - “나는 절대로 기생에 빠지지 않을 터!”
결연한 맹세 - “나는 절대로 기생에 빠지지 않을 터!”

 

제주에 도착하자, 목사는 의도적으로 배비장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그의 위선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절세의 기생 ‘애랑’을 불러 배비장을 유혹하도록 지시한다.

애랑은 단순한 기생이 아니었다. 탁월한 지혜와 재치로 이름난 인물로, 여러 차례 관리들의 교만한 허세를 좌초시킨 전설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배비장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일부러 수수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겸손한 태도로 그를 대한다.

배비장은 처음엔 애써 냉담한 척한다. 그러나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교묘하게 던지는 시적인 말들에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애랑은 “선비님의 굳은 절개야말로 저희 같은 천인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지요.”라며 능청스럽게 그의 자존심을 자극한다.

 

애랑의 첫 등장
애랑의 첫 등장

 

며칠 후, 배비장은 결국 애랑과의 밀회를 약속한다. 한밤중 몰래 기생집으로 향하며, 스스로에게 “이것은 단지 예의상 잠시 들르는 것일 뿐이다”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의 결심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기생집에 도착하자 애랑은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비장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곧 상황은 완전히 반전된다. 갑자기 불쑥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고, 애랑은 크게 외친다.

“여기 계신 분, 그렇게 굳게 맹세하시던 분이 맞으신가요? 모두들 이 선비님의 절개를 직접 확인하시지요!”

 

드러난 위선
드러난 위선

 

배비장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급히 자리를 뜬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는 노래까지 지어 부르며 배비장의 위선을 널리 퍼뜨린다. 이후 제주도는 물론, 조정에도 그의 창피한 이야기가 퍼지게 된다.

결국 배비장은 자신의 허울뿐인 도덕심과 체면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더 이상 남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지 못하게 된다. 작품은 이렇게 통쾌한 풍자와 함께 인간의 허위의식을 신랄하게 꼬집으며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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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주제와 핵심 메시지

『배비장전』은 위선과 허세로 가득 찬 양반사회의 허울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조선 후기, 유교적 명분과 예절이 생활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 그 속에서 오히려 더 큰 위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대부들의 모순된 모습을 애랑이라는 기생을 통해 드러낸다.

특히, 애랑이라는 인물은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성, 그것도 기생이라는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지혜와 통찰로 남성 중심의 위선을 비웃는 존재로 묘사된다. 결국 『배비장전』은 신분과 체면보다 인간 본연의 솔직함과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감상 및 개인적인 해석

오늘날 SNS 속 완벽한 척하는 삶, 보여주기식 성공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배비장이 끊임없이 “나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고 외치던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나는 다르다”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똑같은 선택을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애랑의 존재다. 그녀는 단순히 남성을 유혹하는 기생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지혜로운 인물로, 현대적 페미니즘 시각에서도 다시 해석될 수 있다. ‘유혹’이라는 행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능동적인 사회 비판의 도구로 사용한 그녀의 당당함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읽고 ‘체면’이라는 허울을 벗고 얼마나 솔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배비장 보다 애랑과 같은 현명한 사람이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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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와 시대적 배경

『배비장전』은 구체적인 작가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 후기 한문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기존의 엄숙한 유교 질서와 양반 중심의 사고에 반발하는 민중적 시각의 소설들이 활발히 쓰였다.

풍자와 해학, 그리고 권위에 대한 비판이라는 주제는 『허생전』, 『장끼전』과 같은 동시대 작품들과도 맞닿아 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심각한 계급 모순과 형식적 유교 도덕이 민중의 삶을 억압하던 현실을 반영하는 한편, 독자들에게는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함께 읽어보기

조선시대 문학이 전하는 풍자와 해학, 그리고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허균의 『홍길동전』을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다. 홍길동이 신분 차별을 딛고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야기는 『배비장전』의 사회 비판적 시선과 맞닿아 있다. 또한,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이생규장전」에서는 죽음조차 가로막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지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조선 후기 문학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보다 서민적이고 정감 어린 이야기로는 김유정의 『동백꽃』이 있다. 시골 소년의 서툰 사랑과 순수한 감정 표현 속에서, 시대는 달라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배비장전』과 함께 읽으면, 조선시대 문학의 다양한 색채와 감정을 더욱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배비장전』의 해설과 배경을 좀 더 심화해서 살펴볼 수 있다. 고전 문학 속 인물과 배경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싶다면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고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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